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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그래서 여기에 다정을 약속한다,


연달아 있는 시험 세 개 중 맨 첫 시험이었을 목요일 시험이 다음 주 월요일로 느닷없이 미뤄졌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답장을 보내고 동기 언니와 공부 스케쥴을 상의하고 비행기 시간을 재차 확인하면서 갖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다가 뭐 어떻게 되겠지, 마음을 내려두자마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간 적립해둔 피로가 와르르 무너져서인지, 밤에 씻고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랩탑을 올려 두고 프레젠테이션 두 개를 한꺼번에 만들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구겨진 자세로 새벽에 깨서 랩탑을 바닥에 내려두고 램프를 끄고 이불을 제대로 덮고 낙하하듯 다시 잠이 들었다. 아주 푹 자고 났더니 이른 아침에 깼을 때 마음이 왠지 조금 허했다. 친구가, 무슨 일 있었어? 뒤늦게 답장을 보낸 걸 몇 시간의 텀을 두고 확인했다. 대답을 않고 핸드폰을 만지면서 생각에 불과한 생각을 했다. 아는 언니가 왜 안 자고 있냐고 지챗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니야 언니 방금 일어난 거야 나 아주 푹 잤어.


룸메이트는 식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나는 너희 모두를 위해 기도해, 그렇게 말했고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그래서 입에 샐러드를 쑤셔넣으면서 뭔가 비슷하게 점잖은 말을 해버렸다. 다음 달에 아파트를 또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골치가 한층 더 아파졌다. 이런 행성 같은 기분. 공짜 집이니까 따지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처리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행정적인 일들도 몇 개 튕겨서 돌아왔다. 상상이 나를 관통하는 일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어지러운데.


온몸에 예민함이 버섯처럼 돋아난다. 불평할 거리가 모자라서 하다하다 이제는 확실한 게 없어서 힘들다고 불평했다. 확실하고 싶어? 너무나 차분한 네가 물었고 나는 울었고,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를까 왜


지나치게 따뜻하고, 이런 연말 기분은 어색하고, 나는 어린애처럼 너무 많은 것들이 벅차고. 네가 보이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예전의 나는 직전까지 공명하던 우리의 대화가 맥없이 죽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의 나는 나의 시간이 무거워 미처 너를 안을 겨를이 없었음을 숨을 삼키듯 깨닫는다. 오롯이 미안하다.



+ olan mill - flu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