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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그래서 골목과 언덕 그리고 음표 같은 것들을 부러 생각해,



많은 부고가 그러하듯 생각하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부고를 갑작스레 전해 듣고는 추운 밤길에 멈춰서서 전화를 걸며 울다가 체했다가 토했다가 이내 남은 며칠을 쏜살같이 흘려 보냈고 여러 개의 늦은 시각과 밤거리를 지났고 많은 사람들을 차례대로 껴안았고, 밤을 꼬박 새며 짐가방을 싼 뒤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온 몽롱한 상태에서 또 다른 부고를 무력하게 전해 들었다. 역시나 카톡의 가지런한 활자들로 전달 받은 소식이었고 역시나 매스컴을 타는 비극이었으며 나는 그 여과없음에 뺨을 한 대 맞은 기분이었지만 시차 때문인지 온도차 때문인지 첫 부고 때와는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만 내 얼굴 어딘가에 고여 있는 듯한 불편한 울컥함을 없애려고 넋을 반쯤 놓고 늦은 저녁 익숙하지 않은 차를 몰고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고속도로를 더듬더듬 달렸다. 이와 같이 슬픔은 어째서 느닷없다.


어떻게 투정부릴 수도 없는 일들을 차근차근 소화할 겨를도 없이 빼곡한 일정을 무작정


건너고 보니


어느덧 11월의 절반이 지나버렸다. (이건 산다기보다는 생활하는 거라고, 나는 너에게 혼잣말같은 편지를 썼다.)


11월치고는 지나치게 따뜻한 곳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줄곧 입었던 겨울옷들을 옷걸이에 걸고 마냥 바라본다. 지난 주 학회 때문에 여기와 비슷하게 야자수 가득한 서부로 갔을 때에는 예전 동네에 폭설이 왔다고, 친구들이 앞다투어 눈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거 봐, 눈이 이만큼 왔어! 이만큼... 나는 섭씨 20도를 넘나드는 두 바닷가 도시에서 비현실적인 설원의 사진을 받아보며 추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보라색 꽃들을 서리 속에 가두던 아침 공기와 입김의 입자가 선명하게 보이던 밤 공기는 어떤 것이었는지 상기해보려 애썼다. 너 오늘 밤 그 옷 하나로 절대 못 버틴다면서 건네오던 아주 두꺼운 패딩 점퍼와("이거 입고서 북극에라도 가겠는데")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있던 발끝을 보고 선뜻 발 밑에 깔아주던 이불, 이 날씨에 플랫을 신고 출근하긴 글렀다며 비슷한 시기에 함께 산 부츠, 그런 일련의 추위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너무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그리워한다.



작년 이맘 때에는 매일 저녁 퇴근길에 전차역 앞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사서 커다란 모니터가 있는 학교 도서관으로 가 대학원 원서를 썼는데, 그건 살면서 처음으로 다음 해 이맘 때에 내가 어디에 있게 될지 철저하게 모르는 날들이었기 때문에 교과서처럼 사는데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되는대로 휘청거렸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둥그렇게 의지하며 겨울을 났더니 그래도 각자 적어도 어딘가로는 떠날 수 있었고, 학교만 정해지면 마음 편할 줄 알았는데 학교 안에서의 거처가 불확실한 지금이 사실 더 마음 힘들다. 추워지는 시기에 딱 맞게 따뜻한 곳으로 가게 되니 잘됐다, 위성 캠퍼스 로테이션이야말로 학생이 레지던트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니까 실컷 누리고 즐겨, 고년차들은 칭찬하고 동기들은 부러워하지만 나는 그냥 7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해파리처럼 닻도 없이 떠다니는 느낌이다. 아무도 강요하는 이 없고 선택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어서 더욱 혼란스럽다. 기도 안 찰 어리광임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투덜대지 않는다. 못한다.


그러나 상상하지 않아도 이만큼 선명해질 것임을 안다.



+ nils frahm - s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