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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모든 설명은 이따금 구차하네요 나는 정적을 듣네요,


기본값이 실패인 일을 하고 있다. 일단 실패를 가정하고 들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로부터 쉬지 않고 들어와서 늘 주지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진심으로 숙지하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렸다. 내가 알고자 하는 건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른다, 이 사실에 대한 마음가짐이 단순한 주지에서 그럴싸한 숙지로 바뀌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건 작년 말에 겨우 진실로 깨우쳤고, '디폴트 = 실패'의 공식은 이번 달에 드디어 머리에 새긴 것 같다새겼다. 이제라도 나의 일부가 되어서 가까스로 다행이다. 겨우 마음이 편하다.


따라서: 낭비에 익숙해지기로 한다. 낭비는 곧 죄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생각은 변하지 않겠지만, 못 지킬 약속을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니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해. 게다가 누구나 낭비를 일삼고, 누구나 죄인이다. 함께 수감되는 거라면 견딜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결론으로는 치달아도 좋다. 애초에 우리는 열역학적으로 낭비에 다름없잖아요.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나.


그러나: 언제부턴가 행복의 역치가 너무 높아졌다. 나는 자꾸만 축복을 불행으로 오해한다. 원래의 나는 쉽게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만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내 행복을 재차 질문한 적이 있었다. 행복해? 행복하면 됐고. 행복했으면 좋겠네. 행복하길 바랄게, 진짜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닌 질문으로 흔들려서는 안 되었고,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우유 거품이 다 죽어버릴 때까지 구석에 앉아 있었고, 그 사람의 거짓말을 우연히 발각하면서 나는 남의 삶을 생활로 함부로 재단하는 일을 생각하다가 구두 소리를 죽일 노력도 없이 또각또각 걸었다.



친구는 문가에 서서 방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계속 놀러와 있는 기분이겠다,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친구에게 뭘 좀 마시겠냐고 물었는데 친구는 괜찮다고 했다. 친구가 떠난 뒤 나는 냉장고에 남아 있던 탄산수에 얼음을 잔뜩 넣어 모조리 다 마셔버렸다. 잠옷으로 갈아 입고 가사가 없는 음악을 틀고 논문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진짜로 잠들어버렸다. 정전 같았다. 새벽에 깼을 때에는 방이 환한 채였다. 그렇게 실수로 불을 끄지 않고 여러 밤을 잤다.


아까는 내가 잠든 사이 학교에서 보내온 여행 승인 이메일을 핸드폰으로 읽었다. 금요일에 오피스에서 연락을 받은지 이틀 만이었고, 서류를 다시 넣은지 이 주 만이었다. 떠날 때가 되었다. 늘 함께 숙제를 맞춰보는 동기는 내게 페이스북으로 이런 저런 질문을 하다가 갑자기, 너 가버리면 난 어떡하지? 우는 표정의 스티커를 보내왔다. 괜찮아 우리 스카이프로 숙제 계속 같이 하자, 나도 같은 스티커를 보내면서 대답했다. 나는 늘 이렇게, 몇 명만 있어주면 된다. 그러면 돌아서다가도 나 그렇게 엉망으로 살지는 않았구나, 할 수 있다. 어쨌든 떠날 때가 되었다. 떠날 마음이 계절처럼 돌아왔고 이제는낯설지도않다차라리아주낯설었으면좋겠다 그도 아니면 나는 떨어져도 아프지 않을 낮고 낮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 airhead - aut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