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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so can't you see we're in the middle, somewhere,"


시카고에 있던 사흘 동안 원래 만나려던 친구들 외에도 몇 명을 더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우리 기숙사 RA였던 친구도 있었다. 우리보다 한 학년 위로, 재작년 건축 학사로 졸업해 지금은 시카고의 한 건축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직업이나 성격이나 영락없는 Ted Mosby다("How I Met Your Mother"). 본인은 자신이 Ted Mosby보다는 Barney에 가깝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나... 어쨌든, 학부 때에는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척 얘들아 술 마시면 안 되고 밤에 떠들면 안 되고 파티 열면 안 되고, 이런저런 훈계를 했던 그 친구와 함께 그 친구가 사온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하는 건 또 신기한 일이었다.


밖에서 몇시간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저녁으로 먹다 남긴 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면서 그 친구는 얼마 전 회사에서 승진했다는 소식과 몇 년 더 일하다가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문득 자신이 몇 년 전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는,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단계' 중 몇가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1. 싼 술, Popov 같은 소위 "bottom-shelf liquor" 사지 않기 ("이건 쉬웠지. 졸업하자마자 거의. 의식적으로.")

2. 사진 및 포스터를 액자 없이 벽에 붙이지 않기 ("블루 테이프로 벽에 뭘 붙이는 건 음, 너무 대학 같아서...")

3. 친구가 오면 소파가 아닌 게스트룸에서 재우기 ("그러려면 방 두 개짜리 집에 살아야하니까, 이건 아직이야. 보류.")


나는 아직 싼 술 마시는데! 나를 재워주기로 한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코스트코에서 사온 싸구려 럼을 가르키면서 킥킥 웃었고 나는 나중에 이사가면 벽에 붙여야지, 생각했던 사진들을 떠올렸고 다른 친구는 부엌 문턱에 서서 피자를 두조각째 먹는 그 ex-RA 친구더러 네가 말한 세번째 단계까지 가려면 한참 걸리겠다, 했다.



그 친구처럼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단계들을 의식적으로 정해놓은 적은 없지만 나도, 어떤 나이에는 대충 어떤 모습이겠다, 막연한 그림을 그려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가만 두면 삶이 나를 삶으로 이끌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이끌려 간 그곳들은 경험상, 마냥 아름다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나름 아름다웠고, 그래서 나의 밑그림과 채색이 영 똑같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괜찮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살아지고 있다. 나는 있다.


다만 더욱 솔직하고 유연해질 수 있기를 빈다. 언제부턴가 제대로 환기하는 법을 잊은 것 같다. 어떻게 하는 거더라, 기억이 안 나는데, 망설이다가 일단 문을 열고 보면 차분해야 할 단어들 외에도 갖가지 것들이 순서없이 왈칵 쏟아진다. 그래서였다. 지금 여기 마냥 고이는 불안을 설명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고, 그래서 외로웠고, 그래서 위태로웠다.


한숨 자고 일어나 생각해보니 내가 나에게 말문이 막혀서 나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 같았다.



+ au revoir simone - all or 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