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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존재

청춘03


난 순간 나 혼자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말을 맺었다. 너는 말을 멈춘지 오래였고 정적만 곧고 길게 이어졌다. 왠지 깨면 안 될 것 같은 정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 했다.

- 지금 난 이미 기숙사에 도착했지만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로비 쇼파에 앉아 있다는 것
- 방으로 가서 내일 있을 컴싸 퀴즈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다는 것
- 그래도 결국은 하게 되리라는 것

- 옆에서 우리 층 남자애가 잔뜩 몰입한 채로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지만 난 그게 달갑지 않다는 것
-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대강
  + 현재 내가 짊어진 나에 대한 타인(들)의 숱한 기대에 부합하지 못 하리라는 두려움
    + 내 자신에 있어서 옅어져 가는 확신과 신뢰
     + 성장
      + 친구(이외에는 적절한 명사가 생각나지 않는 사람)와의 관계 개선
       + 언제나 그랬듯이 어느 하나 확실할 것 없는 미래
        + 내가 직면해 있는 모든 상황
         + 그 이외의 여러가지 먼지 같은 뿌옇고 사소한 문제들
    이라는 것
- 그리고 내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 한 고민들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것
- 그게 머리 아플 정도로 무섭다는 것
- 결국 나도 이런 인간 밖에 되지 않아 웃음이 난다는 것
- 사실은 오늘 오전에 내가 울 뻔 했다는 것
- 그때 (너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했다는 것
- 하지만 점심 약속이 있어 관뒀다는 것
- 그래서 왠지 아무 말 없는 니 마음을 알 것 같다는 것

- 혹시 너도 지금 울고 싶냐는 것
  + 만약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다는 것
    + 만약 울고 싶지 않으면 한 번 울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것
      + 만약 울고 있다면 내가 옆에서 다독여주고 싶다는 것
- 그러지 못 해 나도 외롭다는 것
- 우리가 만약 물리적으로 가까웠으면 조금은 덜 외로웠을까 하는 것
- 왠지 그래도 외로웠을 것 같다는 것
- 하지만 적어도 덜 쓸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 살다 보면 가끔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것
-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물론 싫겠지만 우리는 타협해야만 한다는 것
- 나도 타협하려고 꾸준히 노력한다는 것
- 그게 아마도 어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
- 그나저나 추운데 감기 걸리지 말라는 것
- 보고 싶다는 것
-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

저 많은 것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통화는 곧 끊어졌다.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로비에서 기타를 치던 남자애가 지금 내 방 옆 커먼룸에서 다시 기타를 치고 있다. 로비에서 연습하던 곡을 연주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