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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첫눈이 왔다 오늘 오후 농구를 하러 체육관으로


첫눈이 왔다. 오늘 오후 농구를 하러 체육관으로 가는 길은 몹시 추웠고, Francis Field 옆을 지나갈 때 예진이는 너무 춥다면서 먼저 체육관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유석이, 재원이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가다 나는 문득 하늘을 보면서 왠지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좁쌀같은 눈이 얼굴을 때렸다. 첫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 이하의 첫눈이었다. 포근한 눈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추웠다. 두 시간 넘게 농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도 볼품없는 좁쌀눈은 잊혀질 만 하면 드문드문 내렸고 나는 조금이라도 덜 추우려고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썼다. 약간 삐끗한 손가락 마디는 그래도 여전히 시렸다. 방에 허겁지겁 들어서서 문을 소리나게 닫고 나서야 방 안의 온기가 확 끼쳐왔다. 몸이 녹았다.

내가 어젯밤에 느낀 온기는 상대방의 진심에서 비롯되었다.

어젯밤, 나는 본의 아니게 사과를 받았다. 나는 너의 미안해, 를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처음에는 무슨 바람이라도 들었나 했지만 너는 꽤나 진심인 것 같았다. 나에게 내뱉어진 그 말들이 조금도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회상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다. 돌이켜보자면 그 상황이야말로 자메 부jamais vu. 하지만 그 미시감에도 불구하고 내가 온기를 느꼈던 이유는 그 몇 마디로 인해 너와 나의 관계가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음이 간접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녹았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나는 너와 내가 다소 성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널, 많이, 신경쓰고, 있다, 라고 마디를 끊어가며 또박또박 발음하는 너에게 새삼 고마웠던 거겠지. 너는 나에게 미안해, 라고 말했어도 나는 너에게 고마워, 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렇듯, 확실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심 섞인 솔직한 몇 마디만 있으면 된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는 항상, 혹은 적어도 열에 아홉은 너를 진심으로 대했으니까 많은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음 번에는 눈이 조금 더 포근하게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