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장 보통의 존재

72.00비트


전화기 너머 L은 웃으며 "너무 오랫동안 마음이 허했잖아."라고 말했다. 그 울림이 새삼 나에게 닿았다. 나는, "그랬나?"하고 되물으면서 따라 웃었던 것 같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주문한 저녁은 그날 따라 조리가 늦었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나는 문득 넌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하려고 했다. 자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넌 자고 있을테니까.

곧 음식이 나왔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참 기계적인 식사를 했다.


내가 앉아 있고 네가 서 있을 때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너의 손으로 갔다. 손 마디가 정직하게 빨간 것이 추워 보였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네 손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넌 내가 질문한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너는 가끔 지나치게 성실하다. 굳이 완벽한 것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절대명제가 아니므로 나는 때로 너에게서 작은 허점들을 보고 싶다. 그 허점들에 붙어 올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은 정말 아름다울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올 뿐이고 굳이 접점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건 마치 고해성사처럼 내가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가리려고 하지 않는 가장 순수한 몸짓이다.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모든 껍질들이 허물이 되어 떨어져나갈 때 쯤에서야 나는 너를 제대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담아내던 네가 분명 흘러 넘쳤고 그 바람에 흠뻑 젖어버린 나는 그 범람을 언제까지고 모른 척 간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뱉지 못 했던 숱한 언어에 목까지 따갑다.

그렇다고 감기에 걸릴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