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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도서관이 집 같던 시간이 무사히 지났다 같은


도서관이 집 같던 시간이 무사히 지났다. 같은 층에 사는 John이 도서관 2층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Chloe, are we floormates? Why do I see you here more often than on our floor?"이라고 농담을 던졌을 때 "하하 너네들이 불행하게도 내 방 옆에 위치한 커먼룸에서 떠들지만 않았어도, 아니 quiet hour만 제대로 지켜줬어도 내가 학기 초부터 꾸준히 방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웃었다. 시험 기간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에 더 많이 머물렀던 것은 어쨌거나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렇게나 지겹고 초조한 reading period를 나름대로 즐겁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함께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던 이곳 친구들과, 지칠 때마다 전화로 서로를 달래던 바깥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립은 인간이 지니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이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은 때로 굉장한 힘이 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 8시의 다소 이른 화학 시험을 치러 가는 길에, 누군가가 눈 내린 벽에 "I HATE CHEM"이라고 또박또박 적은 낙서 밑에 또 다른 누군가가 "ME TOO"라고 결연한 글씨체의 낙서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백 명의 풀죽은 아이들이 그걸 보며 잠시나마 시시덕대며 웃을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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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어느 날 도서관에서의 예진이 나 상희. 내가 성호 폴햄 잠바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대근 선배 생일이었나보다. 끝도 없는 시험 공부로 인해 머리는 아프고 과도한 카페인 섭취로 인해 배는 아프고 정신을 살짝 빼놓고 산 턱에 꼴은 다소 폐인이어도,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니라는 거죠.

심리학 시험 후(벌써 채점이 끝난) 캠랩 시험지를 찾아서 Lab Sci 밖을 나오는데, 공기가 달랐다. 요 며칠 꾸준하게 눈이 내린 덕택에 차갑게 맑아진 공기가 새삼 기분이 좋았다. 오후 다섯 시 밖에 안 됐는데도 벌써 어둑어둑해진 눈 내린 캠퍼스가 새롭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자메 부jamais vu!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 나는 하루에 파이널을 두 개 치고나면 뭔가 기분이 조금 더 뛸 듯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냥, 함박눈이 올 때 들리는 그 특유의 적막함? 먹먹함? 머릿속이 그런 기분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냥 조금 졸린 기분으로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가서 늦저녁까지 잠을 잤다.

어쨌거나 이렇게 세인트루이스에서의 한 학기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내일 오전이면 시애틀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를 탄다. 학기 중에는 별로 한국이 그립지도 않았고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지만 11월 중반 정도에 다소 늦게 비행기표를 예매하면서부터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자라나더니 지난 주에는 그 마음이 최고점에 달했다. 가서 한국 음식 왕창 먹고 와야지. 머리 좀 제대로 식히고 와야겠다.

그럼 여러분들, 한국에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