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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마침 하루 종일 수업이 없던 오늘 오전에

 
마침 하루 종일 수업이 없던 오늘, 오전에 느즈막히 일어나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DJ Okawari의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바이오 세미나 파이널 리포트 자료를 찾았다. 그러다 배가 고파 아점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어제 쓰던 에세이를 마저 써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챙기다 말고 민사 동창회 싸이 클럽에 들어갔다.

4기 선배님 한 분이 얼마 전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르는 선배님이셔서, 사실 그때는 그저 막연한 안타까움과 걱정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님의 친구 되시는 다른 선배님이 쓰신 글이 새로 올라와 있었고, 그 가방에 책을 넣다 말고 나는 그 글을 읽었고, 나는 울었다. 열어 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울었다.

"벌써 스물일곱이나 됐다고 투덜거리던 시기에, 하지만 사실, 이제 겨우 스물 여섯이라고 불러야 할 시기에," 라는 첫 문장을 읽으면서부터 눈물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널, 잊지 않겠다. 네 몫까지 살겠다."라는 문장에서는 룸메가 먼저 밥을 먹으러 나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상 위에 떨어진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기숙사에서 나와 아점을 먹으러 가는 길, 유독 시리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처음 목격한 죽음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생이 하교길에 사온 병아리 삐요의 죽음이었다. 구정이라 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에 같이 데리고 갔더니 어이없게도 차멀미를 한 모양이었다. 상자 속에 누운 채 부리와 다리가 새하얗게 변하며 뻣뻣해지는 삐요의 모습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나보다는 동생이 더욱 슬퍼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우리들이 우울해할 때 친척 어른들께서는 다른 사촌언니들이 키웠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뻔하게도 죽어버린 다른 병아리들에 대해 농담을 하셨다. 나와 내 동생은 결국 움직이지 않는 삐요를 할아버지 집 대문 밖 화단에 묻고 왔다. 그런 우리를 옆에서 지켜보시던 고모는 고양이가 그 자리를 파내지 않게 돌을 올려놓으라고 하셨다.(그러고보니 얼마 전 jazzblaster님의, 병아리에 대한 포스팅에 삐요 얘기를 댓글로 쓴 적이 있는데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요새 들어 갑자기 여러 번 하게 되는 게 참 신기하다.)

내가 중학생일 때 서면 CGV에서 <피터팬>을 보다가 엄마 몰래 울었던 이유는 후크 선장의 칼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죽음도 하나의 모험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피터팬의 모습이 너무 의연해보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은주가 죽었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나는 저녁을 먹다 그만 체할 뻔 했다.

부산의료원에서 봉사를 막 시작했을 무렵, 전날까지만 해도 병이 다 나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웃으며 말하던 한 행려병동 결핵 환자의 침대가 그 다음 날 오전 깨끗하게 비워져 있음을 봤을 때 나는 그 여름에 소름이 돋아 진저리를 쳤다. 수간호사님이 교대 근무를 나온 간호사에게 저 환자, 새벽에 소리를 지르다가 숨을 거뒀다더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듣지 않으려고 했는데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의료원에서 처음으로 응급실에 배치를 받은 날,(응급실은 지독하게 무채색이었다) 쓰고 있던 호흡기에 계속해서 하얀 김을 뿌리던, 얼굴이 완전이 잿빛이던 환자가 갑자기 가쁜 호흡을 하고 그의 몸에 달려 있던 심박측정기가 다급한 신호음을 낼 때 나는 간호사에게("나가요. 이런 거 보지 마요.") 등을 떠밀린 채 사회복지과로 돌아갔다. 복지사님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가서 저, 응급실 간호사님이 다른 데로 배정하시라는데요, 라고 말할 때도 나는 후덜거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봉사활동을 나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응급실에 배정받지 못했다.

11월 SAT 전날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를 마저 읽을 때 가장 강렬하게 슬펐던 부분은 책의 맨 뒤에 스무 장 가량의 종이에 걸쳐 인쇄되어 있던, 9.11 테러 때 불타는 빌딩에서 살고자 투신했(으나 아마도 당연히 죽었)을 사람의, 그 책 주인공 꼬마애의 아빠였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톱보다도 작던 형태였다.

고등학교 3학년 원서 기간, 친구가 자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블로그에 써 놓은 글을 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늘에게 일찍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고 쓴 부분을 보면서 나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코마에 빠진 모습을 나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봐버리고 나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친구가 몇 개월 전 썼던 그 글을 다시 생각하며 병원에서는 참았던 눈물을 떨궜다.

얼마 전 친구 기숙사에 있다가 최진실이 죽었다는 뜬금없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나에게 가까운 사람을 자연의 섭리로 인해 잃어보는 날이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다.

죽음은, 그 누구의 죽음이든 항상 슬프다. 내가,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가(설령 내가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다고 해도) "끝이 난다"는 사실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살았느냐에 상관없이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잘 돌아가셨다'라는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보다 한참 더 많이 어렸을 때 사람은 왜 한 번 밖에 살지 못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한 적이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도 말 못 하겠다.) 그 말을 들은 어떤 학원 오빠가 나에게 "사람이 두 번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봐. 그럼 나는 다른 한 번은 너무 막 살 것 같은데."라고 말해서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었다.(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완전히 나아진 것도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 간단한 문장은 대부분의 경우 참으로 용납하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라는 사람이, 의식이, 영혼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 하고 내가 잘게 잘게 더욱 잘게 부수어져 흙으로 먼지로 티끌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믿기 싫을 뿐더러 믿기도 힘들다. 나는 항상 씩씩하고 용감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는 항상 무력해지고 슬퍼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공평한데, 그렇게 생각해도 조금도 즐거워질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나이가 든다는 사실도 싫어했나보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속으로는 기겁을 했다 - 왜 노화를 자청하지? 라는 생각 뿐이었나보다. 그리고 이건 다소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말로 믿었을 정도로 어렸을 적의 나는 프시케를 비밀스레 내 롤모델로 삼았다.(부끄러운 일인 줄 알기는 했나보다.) 그녀를 사랑하던 에로스가 애써준 덕택에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난 정말 그랬다. 나는 인간이었던 프시케가 영생을 얻었다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그녀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피터팬도 늙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경하기는 했는데, 늙지는 않아도 싸우다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어느 순간부터는 동경하지 않았다.) 신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이유가 넥타르를 마시기 때문이라는 것도 어디서 주워 읽고는 넥타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고민했을 정도로 나는 허무맹랑한 애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아직 많이 행복한 것 같다. 인생이 즐겁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이루고 싶은 것이 많으니 죽음(으로 대변되는 끝)을 두려워하는, 아직은 가능한 한 매우 오래 알차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삶에 있어 체념하는 사람보다는, 삶에 있어 애착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는 아직 많이 행복한 것 같다. 나는 죽음만 무거워하지만 삶과 죽음 모두를 무거워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기에는 한참 자격 미달이다.

따라서 나는 후회없이 살겠다. 매 순간 감사하고 나를 소중히 다루고 내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