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써 이런 말을 해서는

chloed 2009. 12. 18. 21:14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써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벌써부터 노화(?)가 온몸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보통 학교에서 그런 기분이 드는 건 더 이상 밤을 새는 것, 그리고 밤을 새고 나서의 회복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매번 새롭게 깨달을 때이다. 그런데 방학을 한 지금 또 다시 그런 "늙은 기분"이 드는 건, 시차적응이 힘들어졌다는 걸 깨달아서인가... 아, 슬프다. 나는 원래 하룻밤만 푹 자고 일어나면 시차적응이 완벽하게 되어서 항상 내 생체시계에 감사하며 정상적인 수면 시간을 지켜나갔거늘 지금은 밤 아홉 시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졸리다. 찬서한테 열 시 넘어서 전화 오기로 했는데 벌써 너무 졸려....

세인트루이스 - 시애틀 - 인천 - 부산의 경로로 어젯밤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잠도 푹 자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왠일로 이번에는 기내식도 다 챙겨먹고 왔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 두 개를 보던 (세인트루이스 시간으로) 15일 오전부터 한국에 도착해서 김해 공항에 마중 나오신 엄마아빠를 만난 (한국 시간으로) 17일 밤까지 뭔가 내가, 내가 아닌 기분이 들었다? 말하고 나니까 조금 이상한데 되지도 않을 묘사를 좀 해보자면 음, 내가 나라는 기계를 조종해서 시험 두 개를 내리 보고 저녁을 먹고 짐을 싸고 쪽잠을 자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내린 기분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정말, 마지막 시험을 친 날은 손발이 곱아들 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옷을 겹겹이 입고 시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상황이 너무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막상 시험을 다 치고 집에 가려고 건물을 나왔을 때는 그 어떤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 며칠 간 반복적인 생활에 관성이라도 붙었는지 나는 왠지 시험을 하나 더 봐야할 것만 같은, 방에 돌아가면 다시 어떤 책이라도 꺼내서 봐야할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짐을 쌀 때 정도나 되어서야 실감이 조금 나기 시작했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6월 초에 미국에 다시 기어들어갔으니 꼬박 반 년 만에 집에 온 거였다. 이미 파마가 거의 다 풀려버린 머리카락이 그 텀(term)을 알아서 말해주고 있었다 - 파마를 한 이후로 이렇게 파마가 다 풀린 상태로 지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다음 여름에는 한국에 어쩜 안 나오려고 생각 중인데, 이제는 집에 돌아오는 빈도가 더 낮아지겠지. 머리카락은, 미국에서 자르거나 다시 파마하지 않는 이상 더 엉망인 채로 지내겠네.

어쨌거나 나는 집에 왔고 엄마 아빠랑 같이 떡볶이도 먹고 김밥도 먹고 짜장면도 먹고 탕수육도 먹고 오꼬노미야끼도 먹고 오뎅탕도 먹고 와인도 마셨다 - 먹는 얘기 밖에 없지만 집에 온지 24시간 밖에 안 되어서, 엄마랑 오늘 부대에 잠깐 놀러갔다가 할머니댁 잠깐 들린 것 빼고는 아직 한 게 정말 이런 것 밖에 없다. (왠지 부끄럽군!) 정상윤도 얼리 한 번에 딱 붙어서 같이 와인 따면 좀 좋았어?! 불쌍한 내 동생은 아직도 기숙사에서 정시 원서를 눈에 불나게 쓰고 있겠지(... 라고 누나가 간절히 바라고 있단다, 알지? 정신 차리고 원서 쓰도록). 그래, 우리가 같은 학교 다닌 것도 몇 년이니. 이제는 좀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라는 하늘의 계시다!

요지는 집에 오니 매우 좋고 지금 난 매우 졸리다는 것 정도이다. 아, 찬서 전화 어떡하지... 잠이 쏟아진다. 자야겠다? 찬서야 만약 내가 오늘 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내가 니 꿈 꾸면서 자고 있다 정도로 해석해줘 후훗

내일은 서점에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