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e insignificant, a small piece, an ism, no more no less,"
내가 내 글에서 '생각하다'라는 동사를 얼마나 자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메스껍다.
예전부터 운명의 영향력과 의지의 영향력을 각각 절반씩 믿어왔다. 여전히 유효한 이 믿음의 구조는 유전자의 영향력과 환경의 영향력을 믿는 태도와 병렬을 이룬다. 의지의 역량은 무한하지만 운명 또한 내 삶에 분명한 테두리를 긋고 있음을 안다. 테두리가 허락한 범위는 절망적일 정도가 아니라 억울함이 없다. 운명과 의지의 접점은 늘 적당한 만큼만 흥미롭다. 가끔 흔들리고 있어도 지나고 보면 쉽게 납득하게 되는 형태다.
과학적인 믿음은 없다. 믿음을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믿음은 믿음의 믿음성(~ness)을 조금씩 잃고 천천히 퇴색한다. 더 나아가, 누군가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게 되는 순간 그 믿음은 더는 믿음이 아니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믿음' 대신 '이론' 혹은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남의 믿음을 곧이곧대로 흉보고 욕하기 전에 자신의 믿음은 과연 이론에 가깝기라도 한지 뒤돌아볼 일이다.
남의 생활에 마음대로 입장했다가 자기 분에 못 이겨 기승전결 없이 심술부리며 뛰쳐나가는 사람은 늘 있다. 자신들의 믿음을 법칙이라 믿고 남들이 자신의 믿음을 교리로 받아 개종할 것을 기대하면 저렇게 되나, 여태 궁금하다.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했다.
겨울의 경계가 내 머리 위에 고인채로 이틀 동안 설탕같은 눈을 뿌렸다.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이다.
'~고 생각한다'로 끝을 맺는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 버티는 내내 위태로웠다.
+ tricky - makes me wanna 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