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you get what you want, when you just want what you get,"

chloed 2013. 1. 22. 09:32



어떤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 장소에서 보낸 기간의 길이와 밀도, 두 가지의 조화로운 충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잠깐의 여행이나 방문만으로도 그곳에 '살았다'고, 그곳이 '집'이었다고 숨쉬듯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면서도 부럽다. 일시적인 행위의 단기적인 집합만으로도 어느 장소에 살았음이 성립하는 경우도 있구나, 싶어서. 당신들의 기준은 뭐야? 그런 비현실적인 애정은 어떻게 생기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마리아>의 여자애는 말갛게 웃으면서 잠깐 같이 있어도 같이 사는 거잖아, 라고 말한다. 정말?


물론 나도, 내가 머물렀던 모든 곳에 개별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룻밤이라도 잤던 모든 곳은 저마다 조금씩 나의 시간을 그러쥐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곳이 그립다. 그렇지만 지낸 것과 살았던 건 아주 분명히 다르지 않나. 나는 내가 고3 때 두 달 못 되게 머물렀던 대전에서는 '살았다'라고 말할 수 없고, 학교 때문에 삼 년을 보냈던 강원도조차도, 그곳에서 '살았다'라고 말할 때 이질감을 느낀다. 그곳에서 삼 년을 지낸 건 맞지만 그 기간의 특성상 강원도에서 '살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서. 그런데, 혹 그렇다면 나는 그 삼 년 동안 그 어디에서도 살지 않은 게 되는 걸까.


나는 얼마나 살고 있는지. 그저 지내고만 있는 건 아닌지.


또한 자신이 살지 않은 남의 시간을 폄하하기는 얼마나 쉬운지.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는 김연수 작가의 말은 틀림이 없다. 내가 너를 어떻게 알겠니. 몇 년 전 한 친구가 순수예술이 아닌 예술 관련 전공을 택한, 우리가 공통적으로 아는 어떤 애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순수예술을 모독하는 비겁한 선택이었다 말을 하면서. 물론 어린 치기에서 비롯된 조소였겠지만 나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면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 애가 - 본인의 예술적 재능여부를 떠나 -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거쳐왔던 과정의 개요들을 대강이나마 알았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그 애를 변호했다. 그 애가 어쩌다 그런 결정을 했는지 네가 알아? 모르지, 그래도 모독은 모독인 거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가츠동을 먹다가 조금 다퉜다.


이후에 친구는 자신이 성급했음을 인정했지만, 나 또한 오해에 기반한 비난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있을지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 남들이 나에 대해 그런 비난을 얼마나 많이 빚어내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런 오해와 비난이 나라는 사람 자체를 흔들지 않으면 상관 없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타인이 나에 대해 갖는 표상을 흔들 수 있음은 안다. 특히 그런 비난을 직접 마주하게 될 때, 더욱 그러하지. 결국 그런 어긋남을 부분적으로나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것들이라도 얼른 이룩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다시금 체감하면서. 언제나처럼 귀찮은 일들 뿐이다.


다들 같은 마음으로 표류하면 좋겠지만 각자의 생존과 사정이 있겠으니까. 나는 그런 허상을 제시조차 하지 못한다.


성모聖母처럼 세상 모든 것을 고르게 사랑하기에 내 마음은 너무 좁고 얇다. 그래도 언젠가 너를 쥐고 흔들다보면 나름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쏟아질 거라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 stina nordenstam - everyone else in th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