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we're safe, we're cloaked in modern hearts,"

chloed 2012. 10. 1. 15:01


이번 주에 친구들의 생일과 각종 행사가 몰려있어서 정신없이 밖으로 나다녔더니 피로는 곧잘 쏟아지듯 찾아왔고, 나는 자고 있을 때 제일 행복했지만 그건 자고 일어난 직후의 욱신거리는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잠들어 있을 때에는 잠에 빠지는 단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Chelsea 집에는 아주 부드러운 붉은 천이 깔린 거대한 바구니 모양의 의자가 있는데 그 안에 웬만한 크기의 사람이 들어가면 폭 잠기게 되어서 Chelsea는 그걸 자궁womb이라고 부른다. 금요일 밤 즈음에는 정말 패배한 것처럼 피곤해져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떠드는 사이 나는 '자궁' 안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알바를 갔다가 뒤늦게 Chelsea 집에 온 친구가 거의 잠들기 직전의 나를 보더니 옆에 좀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럼, 너도 여기 자궁에 들어와 앉아, 어라 이러니까 말이 좀 이상하네, 어쨌든 너도 여기 앉아, 우리 같은 자궁에서 놀고 있으면 쌍둥이인 건가, 그러게, 우리 어차피 아슬아슬하게 생일 쌍둥이birthday twins잖아, 넌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났으니 시차를 고려하면 우리는 거의 같은 시각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아닌 것 같아, 아닌가, 계산해보면 확실히 아니야, 에이 재미있을 뻔 했는데 아쉽네, 그러네.


그러고 보니 추석이어서 성당 어른분들이 준비해주신 음식으로 명절 음식 기분을 내고 도서관에 가 공부하는 수지 건너편에 앉아서 해야할 일들을 하는 대신 최재천 교수의 <다윈 지능>을 마저 읽었다. 책을 끝냈을 즈음 마침 성엽 오빠가 내가 앉은 책상 옆을 지나가길래 오빠에게 그 책을 빌려주고 나는 지하실로 내려가 다른 책들을 뒤지고 다녔다. 언제 떨어뜨리나 궁금해했던 새 핸드폰을 드디어 한 번 그러나 가볍게 떨어뜨렸고, 찾던 책들 중 두 권은 제자리에 없길래 나머지 책 두 권만 대출했다. 내 책들의 바코드를 찍어주는 사서는 신입생인지 일반 화학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였고 나는 교과서의 표지가 바뀐 걸 보며 내가 저걸 들고 다닌 시절로부터 4년이 흘렀음을 다시 상기하다가 사서가 건네는 책을 받아들었다. 도서관 대문을 통과할 때 대출하지 않은 물건이 있다며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렸지만 뒤를 돌아봤더니 사서가 그냥 가라고 허공에 손짓을 하길래 나는 경고음과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쭉쭉 걸었다. 나중에 오빠가 연락해와 네가 책 중간중간 메모해 놓은 것들이 우습다고 했다. 나는 내가 뭘 적었더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아직도 맞지 않게 어린애 같다고 생각될 때 그러지 않으려고 괜히 더 그러는데 참, 우습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해주지 않는다. '소년'이 가진 어감이 예쁘다는 건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나 혼자만 혀 밑에 간직해오고 있다. 몇 달 전 엄마는 나에게 사춘기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그걸 엄마가 내게 물으면 어떡해요, 그런 건 원래 부모가 더 잘 알지 않나, 그 이전에 사춘기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고, 생물학적 변화를 얘기하시는 거라면 대충 십 년 전이었겠죠, 어쨌든 잘 모르겠는데. 내 말에 엄마는 나의 어떠했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셨지만 정작 나는 그 나날들이 그 '시기'였음이 와닿지 않았고, 고작 그 정도가 그 '시기'였으면 좀 실망스럽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또 딱히 다른 시기가 내 사춘기였던 것 같지도 않던 것이었다. 얼마나 보잘것 없는 고민들만 잔뜩 끌어 안고 끙끙대며 살았는지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잠을 충분히 잤음에도 불구하고 하품이 날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구요, 아니라구요.


... 그러나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붙잡기도 따라가기도 탐탁지 않아서 나는 추억을 두툼하게 깔고 앉아 미적대며 시간만 보낸다. 열린 비밀이라 그냥 약간만 부끄러워하며 뱉어보자면 나는 심심하다고 말은 해도 시간을 그냥 보내는 행위 또한 조금은, 좋다. 시간이 줄줄 새는 걸, 느끼면서, 몸의 여러 부분을 아주 곤두세워 낡아가는 과정의 세세함을 느껴보면서 참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그냥 간다. 수화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벌은 시간을 준 일이라고, 인간이 시간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시간을 보내는 일 말고 더 뭐가 있냐는 짤막한 글을 블로그에 써두었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경이롭다. 우리는 이토록 하찮다. 어쩌면 다들 이 지경으로 답도 안 나오게 불구인지. 나는 수화가 몇 년 전에 썼던 많은 문장들 중 '흐르는 시간보다 더 고요히 흐느낄 때'라는 구절이 제일 좋았다, 혹은 그 구절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내가 멋대로 상상해낸 구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내가 그 시의 그 부분을 영어로 더듬더듬 번역해 어떤 여자애에게 읊어주었을 때 그 여자애는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문장을 여러 번 입 속에서 굴려보다가 마치 수화에게 반한 것처럼 굴었다는 거.


안그래도 짧은 가을 날씨가 아깝게도 오락가락해서 살짝 더운 날도 있는데 미시간으로 박사 과정을 밟으러 간 친구는 며칠 전 아침 기온이 섭씨 0도였다고 했다. 나는 좋겠네, 생각했고 그건 진심이었다.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더 좋다. 목도리를 두르고 발을 동동 굴러도 좋을 날씨를 정말 많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이 스산해지길 바란다.


다행히도 우리는 시간보다 먼저 멸종한다.



+ letting up despite great faults - sophia in g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