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tell me about your purple past story, will your story make me feel sorry,"

chloed 2012. 9. 11. 15:41


전철문에 기대서 책을 읽다가, 오늘도 은행에 못 간 게 기억났다. 수중에 쿼터가 네 개 밖에 없었다. 귀가해보니 우편함에는 USPS 쪽지가 들어 있었고 대문에는 UPS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주문한 책 같은데 다른 하나는 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USPS 쪽지에는 우편물 번호가 적혀있지 않아서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가야 하겠고, UPS 쪽지에는 집이 비어 있을 내일 낮 2시와 5시 사이에 배달을 한 번 더 감행하겠다는 말이 있길래 배달 시간을 조절하려고 알아봤더니 그러고 싶으면 5달러를 내라고 한다. 왜 너네들 마음대로만... 짜증이 났다. 더군다나 세탁물 바구니가 넘치기 직전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현민이가 마침 오늘 은행에 다녀왔다며 내 10달러짜리 지폐를 그만큼의 쿼터로 바꿔줬다.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오자마자 잠옷 바지부터 찾아 다리를 집어 넣었다. 살에 닿는 옷이 따뜻하게 바삭거려서 좋았다. 침대 위에 쏟아둔 세탁물을 개켜 서랍장에 넣다가 가지런한 수건들을 보자 문득 세수가 하고 싶어져서 수건 한 장을 들고 화장실로 가 얼굴 구석구석을 닦았다. 그러다 거울을 봤는데 오늘 입고 나간 청색 탱크탑에 물이 튄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까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머리끈을 찾기 귀찮아 책상 위에 있던 형광펜을 비녀 삼아 머리를 틀어올린 상태여서 내 맨 어깨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부산 집 내 방에는 내 손바닥만한, 각각 다른 모양의 은색 발레리나 모형 세 개가 있(었)는데 무시무시하게 반짝이던 발레복의 반짝이가 무색하게 그 중 어느 하나도 얼굴이 대칭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 위의 그 비대칭 얼굴들이 보기 싫어서 내가 책상 앞에 앉은 자리에서는 옆모습만 보이도록 모형을 돌려두곤 했다. 이상하게 거울 속 맨 어깨를 보니 그 발레리나 모형이 생각나서 거울을 보고 있기 싫어졌다. 비뚜름하게 굳은 어깨. 생일날 친구와 간 집 근처 바에서 우연찮게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고, 그 자리에 합석해서 그들이 사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얘기 도중 어쩐지 서로의 손과 어깨를 안마해주기 시작했을 때, 유난히 말도 참견도 많던 종업원마저 합석해서 다들 안마를 나눴다. 어깨가 나른해지자 졸려서 서둘러 귀가했고 침대에 앉아 친구가 선물이라고 손에 쥐어준 브레드 푸딩을 몇 입 먹다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다. 퇴근 즈음 해서 9층 창문 밖으로 비구름이 서서히 하강해 저 먼 곳에서부터 비를 뿌리며 의대 쪽으로 오는 걸 지켜보고는 놀라서 전철을 타러 급히 뛰어갔지만 이미 사방이 물로 가득했다. 바지 끝자락이 한껏 물에 젖어서,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허벅지까지 빗물에 젖어 있었다. 젖어서 무거워진 바지를 벗어 세탁물 바구니에 던져 넣으면서, 내일 세탁기를 돌려야겠다, 했는데 오늘에야 돌렸다. 이게 다, 내가 말도 안 되게 게을러서가 아니고 동전이 없었기 때문에.

 

 


+ deerhoof - my purple p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