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 Tame Impala - It Is Not Mean To Be /
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비로소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 해가 꽤 강해지고 있지만 종일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다 보면 별로 더운 줄을 모르겠어서 편하다. 자전거 자물쇠가 고장이 나서 전철역까지 걸어다니고 있지만 오전에는 별로 덥지 않으니까. 퇴근길은 좀 덥지만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은 기분이 좋기 때문에 괜찮다. 여름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을 골라 듣는다.
낡은 건물에서 살고 있지만 덕분인지 냉난방이 공짜라, 지난 주 신이 나서 에어컨을 실컷 틀어두고 잤다가 편도가 부어서 나는 심하게 앓았다. 아무리 껴입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결국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했는데 해열제를 먹고 자다가도 추워서 몇 번을 깼다. 약통을 뒤져 지영 언니가 두고 간 항생제를 발견하고 인터넷에서 약성분을 검색해 권장복용량의 두 배를 먹고,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얹은채 정신없이 자다가 새벽에 일어났더니 거짓말처럼 열이 떨어져 있었다. 그 다음날 목은 여전히 좀 아팠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출근할 수 있었는데 대신 박사님이 안 좋은 안색으로 끙끙대고 계셨다. 너한테 병이 옮은 것 같다며 너무 콜록거리셔서 나는 죄송한 마음에 들고 간 항생제를 박사님께 드렸다. 적어도 사흘은 고생할 줄 알았더니 어떻게 하루만에 나았냐면서, 박사님은 이래서 네가 젊은 거라 말씀하셨다. 약을 이만큼 먹었다고 했더니 약을 음식 먹듯 먹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그런데 이왕 약 먹는 거면 확실히 먹고 싶으니까.
오늘은 원래 지난 주에 운좋게 생긴 공짜 영화표로 Chelsea랑 티볼리에서 <I Wish(奇跡)>을 보려고 했는데 내가 예정에 없던 실험 때문에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허탕을 쳤다. 조금 늦게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관람석이 이미 빽빽했던 것. 상영관이 그렇게나 꽉 찬 티볼리는 처음 봤다, 시사회라 그런지. 앞부분이 잘린 영화는 보고 싶지도 않고 해서, 시간이 된다면 그 영화는 주말에 보기로 하고 티볼리에서 나왔다. 방황을 하다가 Chelsea가 시세로에서 밥만 먹어봤지 맥주를 마셔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길래 거기에 가서 맥주를 주문하고 군것질을 했다. Chelsea는 종업원이 추천한 맥주를 마셨고, 나는 예전에 성우가 마셨던 맥주를 시키고 싶어서 기억을 더듬었는데 다른 맥주를 시킨 것 같았다. 아니면 같은 맥주인데 맛이 기억과 다르거나. 해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서 날씨도 선선했다. 성우랑 시세로에 갔을 때도 비슷한 날씨였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도 비슷한 모습으로 티볼리에서 나와 시세로로 직행했었다. 다만 그때는 오늘과 달리 보려던 영화를 실패 없이 봤었지만(<The Artist>의 재상영을 봤었다). 오늘은 평일이라 거리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맥주를 마시며 Chelsea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또 이것저것 대답을 했다. 대부분 나의 인식에 관한 질문들과 대답들이었다. 맥주를 거의 끝냈을 무렵 나는 오늘 마지막 실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읽었던 최재천 교수 칼럼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과학으로 넘어갔다. 성우와 불과 한 달 전 시세로에서 했던 얘기의 많은 부분을 되풀이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우와 그 이야기를 할 때에는 사건의 앞뒤에 확신이 없어서 고민을 했고 그런 나를 성우가 아마도 본의 아니게 안심시켜 줬지만 이번에는 그런 불확실함 없이 안정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Chelsea는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이해할 뿐 아니라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Chelsea를 보다가 내 마음이 그때와 달리 불안하지 않은 걸 깨닫고는 문득, 바라건대 단지 고마움에, 성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