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chloed 2012. 5. 31. 11:03


/ 2:54 - You're Early /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백 년도 더 된 옛 집(게다가 내 방은 북향)을 안 좋아하셨던 엄마는 새 집을 보자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다며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짐도 짐이지만 가구를 옮길 재간이 없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인부들을 불렀는데(이사에 네 도움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했더니 관우는 "하여간에 부모님이 오시면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다니까"라고 했다) 일이 수월하게 처리되는 걸 옆에서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 동안 엄마는 부엌에서 그릇이 든 상자를 여시면서 딸 시집 보낸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에 엄마를 공항에 데려다 드리고 돌아왔는데 다시 잠들지 못해서 짐 정리나 계속 했다. 집 나와 사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꾸만 별 잡스킬이 늘어서, 나사 하나가 빠져 흔들거리는 책꽂이 선반을 머리끈과 포스트잇으로 고칠 수 있었다. 성엽 오빠 덕분에 오피스에 옛 집 열쇠들을 갖다줄 수 있었는데, 오늘 다른 짐들이 생각나서 후배와 점심을 먹고 헤어져 예전 집으로 갔다. 예전에 복사해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며, 옛 애인의 집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가 술에 취해 애인 집 문을 따는 사람 마음이 이럴까 생각하다가 에어컨도 선풍기도 며칠째 틀어두지 않아서 열기로 사방이 후끈거리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가 남기고 간 우롱차 캔을 땄는데 너무 달아서, 물에 희석시켜 마시다가 침대에 엎드려 잠들었다. 뒤죽박죽인 꿈을 꾸다가 핸드폰 문자 소리에 깼다. 집은 아직도 엉망이었다. 거실로 나가 여러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예전 집의 전기와 가스와 인터넷을 끊고 새 집의 인터넷 설치를 요청했다. 밖에서 버스킹하는 애들의 기타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아침에 먹다 만 오렌지를 씹으면서 짐을 정리했다. 저녁을 먹자던 사람이 약속을 못 지키겠다는 연락을 해왔고 별로 놀랍지 않아서 곧바로 바게트를 잘랐다. 씻고 아파트 건물 1층의 스타벅스로 내려와 여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이 스타벅스는 밤 아홉 시에 닫고 새벽 다섯 시에 여는데 폐장해도 인터넷이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은 좋다. 나는 졸업한 것 같지도 여행이 끝난 것 같지도 않다. 오늘은 반달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