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돛단배

저녁을 먹으면서 3학년 시작부터 4학년이 되기 직전까지

chloed 2012. 2. 6. 15:40

저녁을 먹으면서 3학년 시작부터 4학년이 되기 직전까지, 대부분의 경우 핸드폰으로 찍었던 조악한 사진들을 보았다. 기억들을 추렸다. 시간 순서 랜덤이다.



생일 때 받은 꽃을 망가진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기억
 


고학년이 된 것을 기숙사가 알아서 뽐내주던 기억



미술관에서 Frank B와 사진 찍은 기억



상그리아 앞에 앉아 심각하게 문자 보내던 기억



한여름 밤에 모기에 뜯기며 전철 기다린 기억



먹으면 행복하던 기억
(그런데 나는 대두인가 어좁이인가 둘 다인가)



더위에 허덕이다 프로요 먹으며 황홀해하던 기억



이걸 내 방 벽에 박아 두고 싶었던 기억
(혹은 욕망)



생일인 척 케이크 장식을 요청한 기억



여름에 같이 살던 친구가 GRE 아침 응원 식사를 마련해줬던 기억



빠에야가 역시나 맛있었던 기억



비바람 치던 날 처음으로 파이브 가이즈 먹던 기억



관우가 공원에서 잠옷 입고 공부할 때 옆에서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젤로샷 단체로 퍼 먹던 기억



미국 독립기념일에 친구 집에서 먹고 마시던 기억



와인은 있는데 코르크 따개가 없어서 장비를 동원했던 기억



사순절 동안 커피 끊었을 때 친구가 내게 어떤 엽서 사진을 찍어 보내준 기억



커피 맛 잘 모르지만 집 앞 카페 라떼는 진짜 엄청 맛있는 기억



그러나 커피가 그냥 생존수단인 기억
(여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도로 께속)



얼음 넣은 라떼 빨고 Olafur Arnalds 들으며 공부하던 기억
(아니면, 사실은 학생이 상팔자라는 진리)



잠바 주스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던 기억



맞춤 안대를 뽐내며 셀카 찍던 기억
(아직도 저 안대 가끔 끼고 자는 일상)



따뜻한 곳에서 학교 투어를 받던 기억

 


오밤중에 사람들 데리러 버스역으로 가던 기억



아무도 없는 도서관 카페에 있었던 기억



GRE 치고 이틀 쉬면서 카페에서 혼자 책 읽었던 기억



돌벤치에 앉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



동굴 같은 방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열흘을 혼자 현미경 봤던 기억
(목과 어깨가 분리되고 실어증에 걸릴 뻔 했던 과거)



안 쉬고 일하다가 교수님한테 들켜서 강제 휴가 받은 기억



아름다운 편지 봉투를 받은 기억



손등에 남이 색칠해준(헤나) 기억



후배가 자기 노트에 색칠했던 기억



기숙사 주차장에서 본 하늘이 예뻤던 기억

 


하늘이 어떤 계시처럼 보였던 기억



시카고 여섯 번째로 가서 핸콕 타워 처음 올라간 기억



울면서 간 시카고에서 바다라고 최면을 걸며 호수를 봤던 기억



회전목마를 보며 여덟 살 때 생각을 했던 기억



동생이랑 같이 동생 학교 축제 보러 간 기억



CC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취중에 주위 사람들과 다 친구가 되었던 기억
(그리고 지금은 그들 중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데킬라를 마시고 사람들 속에서 Tiesto 봤던 기억



of Montreal 보컬이 치마 입고 노래 부르는 걸 본 기억


공연 인증 사진들을 훑다가 Jonsi 공연 사진이 없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아니 그 공연은 꿈이었단 말인가?) 긴 머리의 나를 볼 때마다 생소했고 내 사진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고. 먹고 마시는 사진이 많다는 사실 앞에서는 웃기만 했다. 사진이 좋은 건 좋은 기억들을 선택적으로 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보통, 슬플 때 카메라를 꺼내어 피사체에 렌즈를 들이밀지는 않으니까(...그렇다면 눈물 셀카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때 찬서가 미친듯이 사람들 사진을 찍고 다녔던 걸 기억한다. 그것들을 보면 우리들의 고3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시차(時差) 때문이다(김경주)"라고 했나?

어쨌든 남는 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