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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i love you, i love, rainbow, all the music is the rainbow,"


방금까지 뭔가를 굉장히 많이 썼다가 다, 지웠다. 그 많은 단어들을 나열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지를 생각해보니 그냥 다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예진이가 보내준 책 중 <Notes from the Underground(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있었다. 언젠가 예진이는 여러 번 읽어 색이 바랜 그 책을 나한테 보여주면서, 고등학생 때 이 책은 내 바이블이었어,라고 그랬었는데. 그랬던 책을 내가 받아도 되나 싶어 황송했다. 몇 주 전 친구의 친구가 책 <The Elegance of the Hedgehog(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추천해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도 없고 영 정도 가지 않아서 내일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할 생각이다.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는, 그러다가 어떤 책은 결국 끝내지 못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어서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근본부터 너무 정신사납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 비를 조금 맞으며 헬스장에 가서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를 틀어두고 운동을 했다. 샤워를 하고 관우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왔더니 이미 오후 네 시였다. 핸드폰을 관우 집에 두고 와서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자꾸만 멍청한 기분이 든다. 몇 달 안에 스마트폰을 살 생각이어서 사람들에게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중 어느 것이 좋을지 물어보고 다닌다. 성우가 알려주길, 여기에서 2년 약정으로 스마트폰을 사면 한국에서 사용하지 못한다고("기계만 사면 되긴 하는데 그럼 비싸니까,"). 그럼 나 내년에 귀국하면 어떡하지? 사실 핸드폰은 없어도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이 고생할 뿐이다. 나 핸드폰 없는데,처럼 간편한 변명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 말 다음에 그냥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라는 말을 붙이면 상황은 적당해진다.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심지어 당당하기까지 하다. 그 변명에 편승하여 원할 때마다 숨어 지내던 재작년 여름, 툭하면 이상한 부분에 집요하게 굴던 후배 한 명은 내가 갈 만한 카페 몇 군데에 차례대로 전화를 돌려("클로이라는 이름의 머리 긴 동양 여자애, 혹시 거기 있나요?") 유기화학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나를 기어이 찾아냈었다. 카페 카운터를 보던 여자가 나에게 걸어와 누가 전화로 나를 찾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뭔가 들킨 사람처럼 눈을 끔뻑였지만, 모르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누가 날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속죄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 the books - enjoy your worries, you may never have them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