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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지는 것들이 좋다 분리의 개념이 여실할 때



/ Rachel's - Wally, Egon and the Models in the Studio /



만져지는 것들이 좋다. 분리의 개념이 여실할 때, 유형(有刑)이라는 건 나를 포함한 누구나 적어도 약간은 안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다. 이건 모두 내 마음이 작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단위를 설정한다는 건 배수진을 치는 일과 비슷하니까. 그렇게 나는, 추상의 물질로의 환원에 너무 쉽게 매료되었고. 관념이 만져지는 순간 나는 위안 받는다. 그래서 모든 반론들을 간과하며까지, 이러한 기승전결로 생물학을 하게 되었다고 자꾸만 내게 나를 성립시킨다. 내게 그런 내러티브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따라서 나는 이야기를 더욱 장황하게 지어내고, 그 근원은 내면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오래도록 일상이다. 볼품이 없는 걸 안다. 하지만 취미와도 같은 이 얄팍한 서사마저 없으면 나는 길을 잃는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좌담에서 한 평론가(영화기자?)는, 김기덕은 마치 "인간이 현실에서 행할 수 있는 구원에 가장 근접한 행위가 손으로 물건을 지어내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어제 새벽 살짝 취한 채로 무턱대고 인쇄소 연락을 기다리다가, 역시나 늦게까지 깨어있던 성우에게 그 말을 인용해주며 너도 구원을 만들렴, 했다. 내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성우는 대답 대신 그렇게 질문을 했다. 많이 늦은 시각이었고, 인쇄소는 자꾸만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아 많이 지쳤었다. 몸을 접고 잠이 들었다가 오전 일찍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로레인의 도움으로 다른 인쇄소에 갔다. 모든 일은 잘 해결되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심포지엄에 갔다. 나는 내 무능력 자체에는 불만이 적지만 그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현상에는 목이 따가워진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고마운 사람들이 남는다/남아준다. 아버지가 이름을 잘 지어주셔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나도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하겠지. 그나마 몇가지가 있다. 매트 용지를 손으로 쓸어 보면, 안타깝게 매달렸던 시간이 만져진다. 최초의 우리 모두는 시각 이전에 촉각을 지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