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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

사람들은 어떻게 홀로 수면을 취할 수 있습니까? 최근에 봤던 삼십 분 가량의 단편영화에서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집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 흔드는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기차가 도착하기 몇 분 전부터 창문 밖을 기웃거리며 기차를 기다리고, 기차가 집 옆을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집 안의 접시들은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그 단편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특정한 루틴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그 루틴이 예고 없이 흔들리고 깨어질 때의 환희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단편영화는 실화 바탕이고, 여자는 제인 버킨이 연기했다. 나와 동갑인 남자가 감독을 했는데 그는 취리히의 어떤 오케스트라 객원 멤버로, 첼로를 연주한단다. 루틴처럼 첼로를 켜는 걸까, 루틴처럼 영화를 찍는 걸까. 깜빡하고 창문을 있는대로 열어두고 잤다.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나의 루틴이 아.. 더보기
모든 성인成人의 동공을 믿으며 재작년 쯤 만났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사실 작년에도 연락이 한 번 왔었고 그땐 그걸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하루 정도 있다가 너도 잘 지내니, 했다. 팔 개월을 배만 탔다고 한다. 이제야 육지인 것이 실감이 나네, 뭐 그런 소설 같은 말을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는 몇 년 전 남해의 가족 공동묘에 수국을 들고 갔다가 바다에서 파도를 만난 뒤 실종되었다는 조상의 묘비를 본 기억과 제주에 사는 친척동생이 누나 저 대학은 육지에서 다니려고요, 했던 기억이 범벅이 되어 그래, 육지로 잘 돌아왔어. 역시나 똑같이 소설 같은 말을 한다. 가끔 어떤 말들은 내가 뱉고도 내가 뱉은 말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 안에서 입 벙긋대면 나는 그 입술을 따라 읽고, 그저 따라 읽은 것 뿐인데 그 입술과 지.. 더보기
함께 무덤을 파던 날 우리는 사랑에 눈이 멀고 너무 많은 것들이 상관 없어지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떡하나, 고민했던 것도 불과 얼마 전 같은데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상관 없어져 버렸고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지만, 아무렴 상관이 없다. 같은 이름을 불러도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해 기분도 덩달아 이상해지던 적이 있는데 그마저도 더는... 아 그래 생각났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만 난 어디야, 어디 쯤이야? 목숨이 걸린 것처럼 물어오는 사람은 대충 책 덮어두고 정말이지 너란 사람은 나랑 아무런 약속도 안 해도 돼서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좀 구차해지기도 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나 싶어서? 적막을 배경처럼 깔아두고 기어코 그런 생각 둥그렇게 주먹 쥐어서? 하지만 방금의 이것은 내가 머리를 겨우 치약 쥐어짜서 나온 외마디이고 나는 정말 상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