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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헤아리는 대신 세어볼 수 있었다면 나는 그걸 숫자라고 불렀겠지











월초의 보물같은 긴 주말 겸 생일 기념으로 다녀온 뉴욕에서는 한낮부터 한바탕 취했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떠들었고, 철로를 따라 걸었다. 나름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허리케인 소식에 밀린 일을 처리하는 중간중간 물을 구하러 다니고 차에 기름을 채우는 등 정신없이 채비를 하다가, 작년 허리케인 매튜 때 한바탕 대피를 하면서 이 소동은 디펜스에 마치 어떤 이야기처럼 꼭 들어가고야 말겠지, 그런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그 짓을 설마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툴툴댔다. 기분이 안 좋은 걸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면 조는 검지를 내 아랫입술 위에 올리며 여기에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을 수도 있겠네, 그런 말을 한다. 자기가 어릴 때 어머니가 하던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허리케인에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서, 엄마는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전기가 끊길 것을 대비해 냉동실의 음식들을 하나하나 해동해 여러 끼니를 때우고, 바리바리 짐을 싸서 내륙으로 대피했다. 내가 대피한 집에는 개가 두 마리 있어서 먼지는 다른 안전한 집에 맡기고 종종 사진을 전송받았다. 함께 대피한 사람들과 각자 준비해온 음식들을 하나둘 까먹고,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풋볼 경기를 연달아 시청하고,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두고, 조와 머리를 맞대고 뉴요커에 실린 싯다르타 무케르지 칼럼을 함께 읽었다. 한밤중에 당도한 허리케인은 온 도시의 전기를 끊어놓고 요란하게 북상했다. 잠에서 깬 우리는 손전등 불빛으로 샤워를 하고 손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책을 읽고 까무룩 낮잠을 자고 무료하게 기다리다가 바닷가 동네를 잇는 다리가 열렸다는 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귀가했다. 48시간 만이었다.


그런 식으로, 쏜살같은 기분으로 보내는 9월이다. 일터로 복귀하기 무섭게 포스터 인쇄를 맡기고 캐리어를 챙겨 아침 일찍 출근해, 실험을 미친듯이 다 끝내자마자 공항으로 갔다. 학교 본부에 출장 가기 위해서였다. 공항으로 떠나기 10분 전 데이터들을 허겁지겁 스캔하고 있는데 테크니션 한 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너 오늘 출장 간다고 하지 않았니? 하셨다.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을까?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하루 정도의 짧고 빡빡한 일정 동안, 박사 1년차였을 때 함께 일했던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너무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과 점심식사를 하고, 인쇄소 실수로 늦게 전달 받은 포스터를 발표해 상을 받고,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연초에 보고 여태 못 봤던 친구들을 봤다. 두통과 근육통 때문에 속이 아플 것을 예상하면서도 삼켰던 진통제 때문에 역류성 식도염이 재발해서 등을 구부리고 아파했다. 너무 많은 일들을,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된다. 심장 주변를 짓누르는 묵직한 속뜨거움에 자다 깨다 했다.


데드라인 하나를 넘기면 또 다른 데드라인, 그걸 넘기면 또 다른 데드라인이 있다. 속절이 없다. '속절'이라는 단어의 뜻과 어원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 같은 단어다. 생각하면 허전해진다. 소문이 되는 것도, 소문이 되지 않는 것도 둘 다 무섭던 시절이 있었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명확하지? 모르겠다. 해가 뜨기 전후로는 공기가 제법 선선한 계절이지만 아직도 한낮은 태양처럼 뜨겁고, 내가 이렇게나 정신없는 사이 끝나버릴 여름이, 여름이었던 동안에는 그렇게 끝나길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끝나고 나면 섭섭할까봐, 생각날 때마다 바다에 가려고 노력한다. 어째서 나는, 바닷가에 살면서도 바다에 가고 싶을까. 내가 갔던 해안들과 아직 가보지 못한 해안들. 그런 것들이 나를 좀 더 살게 한다. 나는 영원히 이럴 것을, 안다.


오늘도 해가 지기 전에 바다에 가고 싶었지만, 해가 빨갛게 내려가는 걸 창문 밖으로 내다보며 일을 하고 저녁 여덟 시 조금 넘겨 건물을 나섰더니 사방이 이미 깜깜했다. 왜 평소보다 더 어두운 것 같지, 어리둥절 했는데 주차장의 그 어떤 가로등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은 거였다. 건물 하나 새로 올리느라고 한창 공사중이라 그런 건지, 전기를 죄다 끊어둔 건지. 당장의 내 앞을 헤치며 더듬더듬 걷다가 답답해서 핸드폰의 플래시라이트를 켰다. 시야가 갑자기 지나치게 밝아지니 부엉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부엉이는 눈알이 우리처럼 구球가 아닌 튜브 모양이라, 눈알을 굴려 여기저기를 볼 수 없다. 대신 어깨를 움직이지 않고도 목을 거의 완전히 회전해, 머리 뒤를 포함한 주위를 살필 수 있다. 그래서 부엉이의 머리를 실험적으로 고정시키면, 부엉이의 시선 또한 고정되게 된다. 내 두 손으로 새를 직접 쥐어본 적도 없지만 신경과학 하다가 활자로나마 그런 것도 배웠다. 그렇지만 활자는 활자고, 나는 새가 아니고, 눈앞만 억지로 환하고 나머지는 너무 아득한데 어두운 뒤를 후회처럼 돌아보긴 싫고 내 차는 아무리 걸어도 멀리 있어서 덜컥 조금 무서워졌다.


웬일이야 주차장의 불이 전부 꺼졌어, 라고 조에게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클로이? 했다. 그제야 돌아보니 나와 같은 시각에 퇴근하는 조가,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 보였다.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나는 가만 서 있었다. 조는 내가 그간 사랑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력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아직 저녁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 조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더듬어 쥐었고, 나는 그건 여기에도 속절없이 겨울이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맞닿은 손바닥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조가 깃털처럼 웃는 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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