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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존재

2015






새로운 해가 시작된지 삼 주나 지났는데 그간 너무 바빠, 이미 이만큼 멀어진 2015년을 이제야 되돌아본다.


연초에 핸드폰을 바꿨는데, 제대로 찍지 못했거나 실수로 찍은 사진을 모아두는 사진첩 폴더를 따로 만들었다. '잘못'이라 이름 붙였다.











하는 일이 고되었다. 구문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예상대로 힘들었고, 구문시험 이후의 매일매일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과학만으로 힘들면 좋을 텐데, 그게 차라리 축복이라는 걸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쓸모 없어지는 기분 때문에 나는 자주 곤란했다. 가을이 제일 힘들었다. 나는 가을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가을에 힘든 기분이 드는 게 싫었다. 연말이 끝나갈 때까지 날은 좀처럼 추워지지 않아서 가을이 길었고, 기분도 길었다. 영영 추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잭슨빌, 올랜도, 뉴욕, 세인트루이스, 부산, 순천, 군산, 서울, 보인톤 비치, 로체스터, 리노, 사바나, 찰스턴에서 밤을 보냈다. 찰스턴에서는 숙박시설로 보트를 빌려 물 위에서 잤다. 보트를 가볍게 건드리는 물결 때문에 내가 누운 곳이 요람 같았다. 우리 모두 물에서 왔다는 말이 믿어지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바다 주변을 서성였다. 여름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바다에 들어갔다. 죽은 나무가 코끼리처럼 즐비하게 늘어져있는 해변은 무덤 같았다. 끝과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에 익숙해졌는지, 오랜만에 광안리에 갔는데 마치 영화 속의 바다를 보는 듯 너무 작아 놀랐다. 해운대는 갈 때마다 비가 왔다. 서해는 낯설었다.










Two Days, One NightDardenne 감독들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어서 생소했지만 기뻤다. Clouds of Sils Maria는 어찌할 바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Ex Machina는 보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또 봐야지, 했는데 또 보지 못했다. The End of the Tour의 마지막 씬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혹은 그래서) 슬퍼졌다. Amour에 압도당했다. 봄날은 간다를 보며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는 그 시선이, 내가 인생을 나 좋을대로 편집해 기억하는 방식과 흡사해서 징그럽게 좋았다. Spotlight는 조용히 굉장했다.


Of Montreal, Clark, Nosaj Thing, Awolnation, Yellow Claw, Major Lazer, Jack Ü, Astronauts etc., Toro y Moi, Daktyl, 그리고 Slow Magic의 공연을 보았다. Cashmere Cat 공연은 다리를 다쳐서, Sufjan Stevens 공연은 예매할 타이밍을 놓쳐서, 가지 못했다. 운전을 할 때면 주로 Sufjan StevensJamie xx를 들었다. 김사월의 앨범을 들으면 내가 생각나는 곡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잔'의 정직한 목소리를 아주 여러 번 돌려 들었다. 고마웠다.









소설을 여러 권 읽었는데: 한국이 싫어서 대신 호주에서 고생하는 내 또래의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과, 유명한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집착하는 고등학생 소년이 나오는 성장소설과, 어릴 적 신발상자로 카메라를 만들어 처음 찍었던 사진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의사가 나오는 옴니버스 소설. 지금 바로 생각난 소설들은 이 세 권이다.


2015년에도 David Foster Wallace의 소설을 완독하지 못했다. 대신, 유명하지 않은 소설 작가가 90년대에 DFW를 취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DFW 사후에 출간한 책을 먼저 완독했다. 며칠에 걸친 두 사람의 인터뷰 녹취록이 책 전체 내용의 절반을 넘었다. DFW는 외롭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계속 글을 쓰다가, 외로움의 기저에 깔린 우울증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작업하던 책을 미완성인 채로 둔 뒤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 녹취록스러운 책을 쓴 작가는 아직도 유명하지 않고, 아마도 그는 절대로 DFW만큼 유명해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살아있다.


숙제처럼 신형철을 사 읽었다. BarthesBachelard는 느리게 읽었다. 황인찬은 여전히 적당히 좋았다. 여전히 좋은 것도, 적당히 좋은 것도, 이제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여전히 적당히 좋은 일은 배로 어렵다. 드물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Fady Joudah를 단시간에 많이 읽었다. 시 쓰는 의사다. 우리는 모두 죽어서 천사가 되네, 시체실 칠판에 그렇게 낙서했더니 다음 날 누군가 "확실해?" 라고 적어놔서 "천사가 아니라면 꽃이 되지" 대꾸하고는 날아갔다는 대목이 잔상 짙었다. 의사들의 센티멘트에 나는 아마 영원히 마음 약하다.











짧지 않은 연애를 한 사람과 헤어졌다. 언젠가 우리가 서로에게 그저 습관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만해야지,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 끝무렵의 그와 나는 습관조차도 되지 못한 것 같았다. 많은 연애가 그렇다. 우리의 마지막은 공교롭게도 하지夏至였고, 이후로 나의 낮은 홀로 조금씩 짧아졌다. 혼자가 된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연말 즈음 나는 정신이 들었다. 오래 기다렸던 공동저자 논문이 겨우 나왔다. 동지冬至 무렵 나는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난생 처음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난생 처음 머리 염색을 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거의 8년 반 만에 만난 사람과 저녁을 먹었다. 내가 10년 가까이 못 본 사람과 재회하는 나이가 됐구나, 생각했다. 한 해의 아슬아슬한 끝에 운좋게 눈을 맞았다. 영영 추워지지 않을 것 같더라도 추워지고야 마는 것이다. 역시 속단하면 안 된다. 얼굴에 붙은 얼음 같은 눈송이를 떼어내며 성냥 냄새를 맡다가, 문득 잘 살아보고 싶어졌다. 새해 계획 세워야겠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새로운 해를 맞아 줄이고 싶은 몇 가지와 늘리고 싶은 몇 가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난 일 년 살면서 명확해진 몇 가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들을 조금 모른척 한다. 다만 나는 나를 절대적으로 아끼고 응원해야지. 생각하기 전에 일삼을 것이다. 설령 잘 못 살더라도 나는 잘못 사는 것이 아니므로. 매 순간 온전할 것을 믿는다.